너무 쉬운 천국 (2021.07.11)

Comme il serait simple
de ne se souvenir que des bons moments
Et comme il serait facile d’echanger ces precieuses experiences
contre de vains sentiments*

*좋았던 것들만 기억하는 건 얼마나 쉬운가
값비싼 경험을 팔아 값싼 감상을 사는 건 또 얼마나 쉬운가

얼마 전 해체된 <가을방학> 2집에 실린 노래 ‘진주’ 가사 말미에 적혀 있는 글입니다. ‘에덴의 계절은 10월이었을 것’이라는 게 저의 지론(^^)인데, 사계절 중 가장 완성도가 높은 계절이라 여기기 때문입니다. 너무 좋은 계절에는 ‘방학’도 없지요. 없는 방학에도 가을은 휙 지나가버립니다. 계절 내내 방학 같아서 그런 걸까요. 어떤 이는 천국이 지루할 거라고도 한다지만 그건 뭘 잘 몰라서 하는 소리입니다. 쉰 번 넘는 가을을 맞고 보냈지만, 가을이 지루해 본 적이 없거든요. 에덴은 지루한 동산이 아닙니다. 언제 지났는지 모르게 ‘하루’가 가고 ‘한 달’이 가고 ‘한 세월’이 지나는 동산입니다.
우리가 발붙여 사는 세월 삼백 예순 다섯 날이 다 ‘가을’은 아니지요. 겨울, 봄, 여름을 지나 맞는 가을이고, 열두 장 달력에 숨어있는 ‘석 달’ 가을입니다. 그 ‘석 달’을 짧다 할 수는 없겠으나 아쉬움 덜기에 충분치는 않습니다. ‘여름’은 어김없이 숨이 막히고, 그 숨 막히는 석 달은 한 없이 깁니다. ‘겨울’ 지나는 일도 혹독한 것이어서, 아무도 그 석 달 계절을 짧다 하지 않습니다. 그 지독한 계절 사이에 들어있어, 가을 석 달은 더 짧은 것일까요. 어쩌면 그래서 가을이 더 아름다운지도 모를 일입니다. 아무려나 ‘여름’과 ‘겨울’, 심지어 ‘봄’에도 있는 ‘방학’이 ‘가을’에는 없습니다. 필요가 없으니까요.
사도 야고보가 보낸 편지 마무리의 한 구절은 이렇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길이 참으라.” 참을 인(忍)자 세 개면 살인도 면한다지만, 참고 견디는 일이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한두 번 혹은 하루 이틀이 아니라, 두고두고 참아야 하고 ‘주님 오실 때까지’ 참아야 한다는 건 죽으라는 말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실은 사도는 지금 ‘죽으라’는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죽어야 사는 믿음의 법도, 그게 사도들이 전하려했던 그리스도의 십자가였으니까요. 하여 사도는 이렇게 말씀을 덧붙입니다.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에덴의 계절에는 언제나 추수였겠으나, 우리 사는 계절에는 가을이어야 추수입니다. 추수를 바라는 농부의 땀방울이 근면과 성실로만 맺히는 건 아니지요. 눈물과 한숨이 섞이지 않은 농부의 땀을 어느 논밭에서 볼 수 있을까요. 추수의 계절을 바라며 ‘견디는’ 세월이지만 ‘바람의 소망’이 ‘당장의 눈물’을 없앨 수 있는 건 아닙니다. 그래서 ‘더’ 견뎌야 하고 ‘길이’ 참아야 하는 것이겠지요. ‘방학’이 굳이 필요 없는 계절이 우리의 소망이지만, 당장의 계절에는 방학도 필요하니까요. 그러기에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견딜만한 아픔”을 주실 겁니다. 우리 아픔을 모른체 않으시는, 긍휼에 풍성하신 분이니까요.
“좋았던 것들만 기억하는 건 얼마나 쉬운가”요. “값비싼 경험을 팔아 값싼 감상을 사는 건 또 얼마나 쉬운가”요. 우리가 ‘천국’을 너무 쉽게 얻으려 했던 건 아닐까요. ‘예수천당 불신지옥’이 팻말과 구호에 그칠 수 없다는 걸 미처 헤아리지 못했거나 애써 외면했던 건 아닐까요. 하루 현실의 고단함과 질퍽함으로 ‘온전한 믿음’을 지킨다는 게 얼마나 치열한 것인지 묻거나 대답하지 못한 채 너무 오래 지나온 것은 아닐까요.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 예수 십자가의 피를 ‘공짜’로 알아, 너무 쉽게 십자가를 손에 쥔 것은 아닐까요. 천국은 “값싼 감상”이 아니어서, 사도가 “길이 참으라” 하신 건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