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인의 길, 악인의 길 (2021.05.23)

“사람이 악으로서 굳게 서지 못하거니와 의인의 뿌리는 움직이지 아니하느니라.”(잠12:3) 잠언의 말씀은 ‘의인’과 ‘악인’의 대비가 도드라집니다. 사람이 악인의 삶이 든든한 것이 아니고, 의인의 뿌리가 견고한 것이라는 말씀도 그렇습니다. 하지만 살다보면 우리가 직면하는 현실은 오히려 악인이 형통하고 의인이 고난 받는 것 같은 모습을 볼 때가 많지요. 그런 모습을 지켜보노라면 하나님 뜻대로 사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믿음으로 사는 게 무슨 소용 있나 싶은 자괴감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 마음이 깊어지면 자칫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는 흔적을 삶속에서 지워가며 살게 되기도 하지요. 우리는 그 버젓한 현실을 두 발 딛고 삽니다만, 그 현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잠언의 말씀은 ‘그렇지 않다’고 ‘그런 게 아니라’고 손사래를 칩니다. ‘악인의 삶은 굳게 서지 못한다’고, ‘의인의 삶이 뿌리 깊은 것-흔들리지 않는 것’이라고 힘주어 말씀합니다.
의인과 악인의 대비 한 대목을 더 살펴볼까요. “악인의 말은 사람을 엿보아 피를 흘리자 하는 것이거니와 정직한 자의 입은 사람을 구원하느니라.”(잠11:6) 악한 사람의 ‘말’은 ‘피’를 흘리게 하지만, ‘의인의 말’은 사람을 ‘구원’합니다. 그 사람의 말은 그 사람 생각에서 나오지요. “의인의 생각은 정직하여도 악인의 도모는 속임이니라.”(잠11:5) 의인의 바른 생각에서 사람 살리는 말이 나오고, 악인의 도모에서 사람 해치는 말이 나옵니다. 그 결국은 불을 보듯 뻔합니다. “악인은 엎드려져서 소멸되려니와 의인의 집은 서 있으리라.”(잠11:7) 악인의 생각과 말로 빚는 결국은 무너진 성과 같고, 의인의 생각과 말로 세워진 성은 든든합니다. 우리가 살펴 묵상하고 있는 잠언의 말씀은 ‘악인’과 ‘의인’, ‘지혜로운 자’와 ‘어리석은 자’의 대비를 분명히 합니다. ‘이 길’과 ‘저 길’을 보여주며 어디로 갈 것인지, 선택의 방향을 안내해 주고 또 인도해 줍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시편의 첫 장에도 ‘복 있는 사람’과 ‘악한 사람’이 대비됩니다. 그리고 그 결국도 잠언의 말씀과 같습니다. “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시1:6) 그래서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않습니다.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 삽니다(시1:2). 그리 사노라면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다는 거지요(시1:3) 악인은 그렇지 않답니다.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다”고(시1:4) 단정 짓지요. ‘산상수훈’의 예수님 말씀 맨 끄트머리에도 ‘반석위에 집 지은 사람’과 ‘모래 위에 집 지은 사람’이 대비됩니다.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사람’은 든든하겠지만, 예수님 말씀을 듣고도 행하지 않는 사람은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마7:27) 하십니다.
이런 말씀들을 위로가 됩니다. 하지만 현실의 파편을 맞으면 그 위로에 상처가 생깁니다. 그건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말씀처럼 보입니다. 성경의 말씀이 우리가 딛고 있는 현실을 못 본척하는 것일까요? 그럴 리 없습니다. 요는 ‘무엇’이 ‘든든한 삶-흔들리지 않는 삶’인가에 있지요. 눈앞에 보이는 현실을 영원한 것으로 알고 산다면 ‘악인의 형통’은 낙심천만입니다. 그들은 무너질 것 같지 않고, 그래서 주눅이 듭니다. ‘성경’도 그 몹쓸 현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다만 ‘그게 전부’가 아니며, 실은 더 분명한 ‘전부’가 있다는 걸 알려 주지요. 눈앞의 현실만이 아니라, 내 눈으로 ‘보지’ 못하는 현실을 ‘보여’주려는 겁니다. 그걸 ‘보고’나면 악인의 형통에 실족하지 않을 테니까요. 왜 의인의 삶이 견고한 것인지를 헤아릴 수 있게 되니까요. 오늘 살펴 읽은 잠언의 한 구절 은 그렇듯 영원에 잇대어 오늘을 바라보는 믿음으로 ‘아멘’이 되는 말씀일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