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미 한 자루의 지식 (21.05.02)

『-나는 문풍세文風世요. 바다는 죽을 자리고, 배는 죽을 자리를 넘나드는 널빤지요. 배에서는 사공의 말에 따라야 하오. 귀양 가시는 선비도 장교도 마찬가지요.
무안에서 출항할 때 사공 문풍세는 배 탄 사람들에게 말했다. 아무도 대꾸하지 못했다. 도초도를 돌아서 난바다로 나갈 때 문풍세는 또 말했다.
-배에서는 여기가 어디냐, 방향이 맞느냐, 언제 도착하느냐, 바람이 어떨 것이냐를 묻지 마시오. 그게 사공을 대접하는 법도요.
다시 아무도 대꾸하지 못했다.
(중략)
해가 지자 바람은 더욱 불었다. 배에 탄 사람들이 먹은 것을 토했다. 가라앉았던 배가 치솟아오를 때 사람들의 입에서 토사물이 뿜어져 나왔다.
장교는 제 몸을 아전과 역졸의 몸에 한 줄로 묶고 바닥에서 뒹굴며 물었다.
-여보 사공, 여기가 어디오?
문풍세는 대답하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달려드는 파도를 문풍세는 하나씩 타넘으며 배를 부렸다.
아이고 아버지, 어머니, 관세음보살을 부르며 장교는 울부짖었다. 장교의 울음에 어물 장수들이 따라 울었다.
-여보 사공, 이 줄을 묶는 게 좋겠소, 푸는 게 좋겠소?
장교는 소리쳤다. 문풍세는 대답하지 않았다. 장교는 흔들리는 뱃바닥을 기면서 어디론지 가려는 시늉을 하다가 나동그라졌다. 어물 장수들이 내지른 토사물과 똥오줌에 정약전은 뒹굴었다. 배가 치솟고 가라앉을 때마다, 의금부 형틀에서 매를 맞을 때, 하얗게 뒤집히던 고통이 다시 살아났다. 다시 배가 가라앉을 때 정약적은 의식을 잃었다.』

김훈의 소설 <흑산>의 한 대목입니다. 따로 시간 내 소설 읽기가 어려운 분들을 위한 서비스 차원에서 길게 인용해 보았습니다.^^ 서당에서는 훈장이 선생이지만, 서당 지식이 바다에서도 통용되는 건 아닌 가 봅니다. 관아에서야 방망이 든 장교가 대장이겠으나, ‘아버지, 어머니, 관세음보살’을 부르며 뱃바닥을 길 때도 대장은 아니지요. 저 배 뒤집히는 바다에서는 사서삼경 달달 왼 지식이 하나 쓸모없습니다.
5월입니다. 지난 넉 달이 훌쩍 지났는데, 한 해를 세 토막으로 나눈다면 그 중 한 토막이 떨어져 나간 겁니다. 남은 두 토막도 크다, 길다 할 건 못 되지요. 게 눈 감추듯 감쪽같이 사라질 게 뻔합니다. 세월歲月은 유수流水고, 인생人生은 무상無常입니다.
5월부터 ‘잠언’ 묵상을 시작합니다. 첫 날인 어제는 잠1:1-7까지, 잠언 전체의 서론을-주일인 오늘은 잠1:8-19까지, 첫 번째 ‘지혜-훈계’를 살핍니다. ‘잠언’은 ‘지혜의 책’입니다. 언뜻 ‘지혜’라는 말이 뜬 구름을 잡는 ‘추상 언어/개념’으로 들릴 수 있겠으나, ‘잠언’의 ‘지혜’는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어떤 생각을 머리에 두고, 어떤 마음을 가슴에 품으며, 어떤 길에 발을 들일 것인지를 결정하는 ‘지혜’ 그것이 ‘잠언’이라 하겠습니다. 통찰과 분별, 선택과 결정은 ‘뜬 구름’이 아니라 ‘발 디딘 현실’입니다. 서른 한 장 ‘잠언’에 담긴 ‘지혜’는 ‘뜬 구름’ 속으로 들어오라는 초청이 아니라, ‘발 디딘 현실’로 찾아온 ‘말씀’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잠1:7) ‘잠언’은 ‘지혜’의 근간을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에 둡니다. 시작부터 못 박는 말이며, ‘잠언’의 더 큰 서론(단락)인 1장에서 9장을 감싸는 말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잠9:10) 뿐만 아니라 ‘잠언’을 결론짓는 말이기도 하지요.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을 것이라.”(잠31:30)
‘잠언’은 ‘참 되게 아는 지혜’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어설프게 알아 빗나간 인생이 ‘잠언-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노라고 덧붙이지요. 작고하신 신영복 선생께서 <강의>라는 책을 남기셨습니다. 재직하던 학교 강단에서 동양고전을 ‘강의’한 내용을 펴낸 책입니다. 그 책 서두에서 선생은 이런 말씀을 하세요. “고전을 읽겠다는 것은 태산준령 앞에 호미 한 자루로 마주 서는 격입니다.” 사서삼경의 어느 한 책도 ‘통달’하기 어려운 터, 오천년을 이어온 문자와 사상의 ‘태산준령’은 ‘험산준령’이기도 한 거지요. 그걸 지팡이 하나 들고 넘으려 한다거나, 호미 한 자루 손에 쥐고 태산을 무너뜨리려 한다면 소가 웃을 일이겠지요. 사서삼경 왼 지식이 배 뒤집히는 바다를 건너게 하는 건 아니니까요.
‘호미 한 자루의 지식’이 있습니다. 세상이 ‘한 자루 호미’에 ‘태산’을 담겠다는 자들로 빽빽한 콩나물시루 같습니다.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는’ 어리석은 일입니다. 초록색 창 두들겨 얻은-그 똑똑하다는 인공지능의 ‘호미’로 갈고 닦은 번쩍번쩍한 ‘지식’이 어리석음을 더합니다. ‘하늘의 지혜’아래서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가 지혜롭습니다. ‘잠언’을 묵상하는 두 달, 말씀을 헤아리는 ‘호미질’을 피할 수 없겠지만, 그나마의 호미질이 겸손한 것이어서, ‘여호와를 경외’하는 한 날 한 걸음으로 ‘길’ 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샬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