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나은 인사(고후5:1-4) (21.05.09)

참 오래 몸에 머물렀다

주인이듯 내가 머무는 동안에, 몸은
벼라별 모욕을 다 겪고, 몇 군데는
부러지고 꺾이고 곪아서, 끝내
만신창이가 되었을 거다.

귓구명에 감창이 들어차고
뱃구레 가득히 욕지기가 출렁거려
똥구멍이 미어지는 수모를 견디고야, 비로소
몸이 나를 버렸을 거다.

이제 나는 몸이 없는 곳으로 떠난다.

그렇게 몸이 없이 사방을 돌아보면, 아아,
몸 이외에 나는 아무것도 아니구나.
몸이 없는 곳에는 그 어떤 것도 없구나.

송기원 시인의 <몸>이라는 시를 읽어드렸습니다. 우리는 지금 아버님의 입관을 앞두고 있습니다. 염을 하고 아버님의 몸을 관에 모셔 뚜껑을 닫으면, 이제 이 땅에는 그 얼굴을 다시 뵐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입관은 유족들 마음에 더 애절함을 남깁니다.
아버님의 향수가 칠십이 넘었습니다. 예전에는 칠십 인생이 ‘오래 머문’ 여생이었고 그래서 ‘장수’라 했습니다만, ‘백세시대’ 운운하는 요즘 세태대로라면 아무래도 아쉬움이 남는 수입니다. 그런데, 한편 이런 생각이 듭니다. ‘왜 아쉬움이 남을까, 얼마나 더 오래 머물면 여생의 아쉬움을 덜 수 있을까, 아쉬움을 던 다는 게 꼭 더 나은 것일까.’
사람의 ‘몸’을 입고 산다는 게 실은 고역입니다. 모두에 읽어 드린 시 구절처럼 사람의 “몸은 / 벼라별 모욕을 다 겪”으며 한 평생을 살지요. 사는 일에 좋은 일도 있었다 하겠습니다만, 그렇더라도 사는 일은 “부러지고 꺾이고 곪아서, 끝내 / 만신창이가” 되는 일입니다. 사람의 죽은 몸이란 그 만신창이 인생의 결국을 보여 주는 것은 아닐까, 아버님의 입관예배 설교를 준비하며 든 제 마음이 그랬습니다.
죽음이란 ‘몸이 없는 곳으로 떠나는 것’이지요. 어찌 보면 ‘벼라별 모욕’을 받아 내며 ‘만신창이’가 된 몸을 떠난다는 건 후련한 일이고 끝내 바라던 바 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시인은 말했나 봅니다. “몸 이외에 나는 아무것도 아니구나. / 몸이 없는 곳에는 그 어떤 것도 없구나.” ‘죽음’에는 더 이상 받을 모욕이 없고, 더 이상 떠안아야 할 ‘감창疳瘡’이라던가 ‘욕지거리’라던가 ‘수모’가 더 따라다니지 않을 겁니다.
헌데, 오늘 읽어 드린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한 걸음을 더 나갑니다.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고후5:1) 아버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보여주시듯,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라는 하나님의 법칙에는 예외가 없습니다.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은 영원할 수가 없습니다. 누구나 이 땅에서 입고 살던 몸을 벗을 때가옵니다.
앞서 소개한 시인의 말대로 라면 ‘육신의 장막 집을 벗는 것’은 ‘짐’을 벗는 일입니다. 그런데 사도의 말씀대로라면 ‘짐’을 벗을 뿐 아니라 ‘새로운 집’을 얻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사도는 이렇게 말씀을 덧붙이지요. “참으로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 진 것 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히려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 삼킨 바 되게 하려 함이라.”(고후5:4) ‘이 천막집 벗어버리기를 바라는 게 아니라, 그 위에 하늘의 집 덧입기를 바라며, 생명이 죽음을 이기도록 하겠다.’는 뜻 이지요.
오늘, 지금은 ‘육신의 장막 집이 무너진’ 아버님의 몸을 입관하는 시간입니다. ‘여보, 사느라 고생 많았어요.’ ‘아버지, 애쓰셨습니다.’ 작별인사를 나누어야 할 자리이지요. 하지만 아버님의 입관이 ‘작별인사’로 끝나지만은 않을 겁니다. 이제 아버님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하늘의 집’을 덧입으셨으니, 이렇게 인사를 덧붙여야 할 겁니다. “여보, 잘 가세요. 우리 거기서 꼭 다시 만납시다.” “아버지, 훗날 더 근사한 모습으로 다시 뵙겠습니다.”

※ 지난 5월 4일, 김광웅 아버님 입관예배 설교문입니다. 유족들의 위로를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