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열차도 완행 아닐까요? (21.04.25)

가다가 손님이 오면 / 고약한 직행은 그냥 가고요. // 인정 많은 / 완행은 태워줘요. // 달리기는 직행이 이기지만, / 나는 인정 많은 완행이 좋아요.

오래 전 이오덕 선생께서, 당신이 가르치던 아이들의 시를 모아 책으로 펴 낸 게 있답니다. 경북 의성에 있는 ‘이두국민학교 오학년’ 박희영 어린이의 <버스>라는 시도 그 책 한 ‘쪽’을 보탰습니다. 요즘 아이들이 읽으면 이게 뭔 말인가 싶을 겁니다. ‘직행’이나 ‘완행’ 같은 말이 낯 설 기 때문이지요. ‘버스’나 ‘기차’ 앞에 그런 말을 붙여 급히 가는 것과 천천히 가는 것을 구분했다고 설명하면 고개를 끄덕일까요. ‘그랬구나.’ 관심을 보일까요, ‘그랬었나보지’ 시큰둥할까요? 걸어 닿는 반경을 크게 벗어나지 않고, 그 반경을 벗어나는 거리는 ‘자가용’이나 ‘학원 버스’로 오가는 터에 ‘급행’ ‘완행’이 뭔 대수일까요.
벌써 스무 해 다 돼 가는 일입니다. 인도네시아로 건너가신 신균 집사님은 한국의 종합상사에서 근무하셨지요. 해외 출장이 잦았는데, 출장을 앞두곤 간간 ‘비행기 오래 타는 게 힘들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비행기라고는 제주도 갈 때 한 번 타본 게 전부였던 ‘일인’은 그게 뭔 말인지 잘 몰랐습니다. 비행기 ‘오래’ 타는 게 부럽기도 하고, 오래 탈수록 더 좋을 것 같았거든요. 기회가 되어 ‘오래’ 타 본 뒤에야 그게 뭔 말인지를 알았습니다. ‘비행기 타는 기분’이라는 게 그리 오래 가지 않더랍니다. 꼼짝 못하고 열 시간을 넘겨 하늘을 날면, ‘하늘’도 ‘지옥’ 같더라니까요. 그래서 ‘더 빨리-급행’을 찾는 건가요.
‘급행’은 서는 정류장이 많지 않습니다. 정거장 마다 섰다 가면 ‘급히’ 갈 수 없기 때문이지요. ‘완행’은 급할 게 없습니다. 팻말 걸린 정류장 마다 다 서고, 더러는 정거장이 아니어도 손 흔들면 버스를 세워 주기도 합니다. 정거장 마다 선다고 뭐라는 사람 없고, 정거장도 아닌 데 차를 세운다고 투덜거리는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려니 합니다. 그러려고 ‘완행’을 탄 거니까요. ‘직행’의 목적이 ‘도착지’라면, ‘완행’은 ‘가는 길’에 목적이 있습니다. ‘직행’이 ‘시간’을 싣고 쌩 달릴 때, ‘완행’은 ‘세월’을 툴툴툴 싣고 갑니다. 그걸 낭비로 알고 시대에 뒤 떨어진 수단으로 여겨, 더 이상 ‘사람’ 실은 ‘완행’ 구경이 어렵습니다.
‘어서’나 ‘빨리’가 칭찬이 된 시대지요. ‘천천히’가 욕처럼 들리기도 하는데, 그 욕을 먹고도 꿈쩍 않는 ‘완행’ 같은 사람은 시대에 뒤쳐져 ‘한심한 인간’이 되는 걸까요. 좋은 마음으로 등 떠미는 사람들도 있을 겁니다. 뒤처지면 안 된다고, ‘어서’의 엔진을 장착하고 ‘달리기에서 이겨야’ 살아남을 수 있다고, 그러지 말고 ‘빨리’의 기아를 변속해 엑셀을 밟으라고. ‘이겨야’ 살아남을 수 있는지 잘 모르겠지만, 그게 같이 잘 살 사는 길은 아닐 겁니다. 살다보면 ‘급행’을 타야 할 때가 있지요. 하지만 매번 ‘급행만’ 타야 되는 건 아닙니다. 더구나 ‘급행’의 이유가 ‘이기려고’에 있는 거라면 사람 사는 일이 딱해 집니다.
하늘을 나는 건 삼삼한 일입니다. 하지만 비행기에 갇혀 나는 열 시간은 고역입니다. ‘가는’ 것과 ‘사는’ 것이 꼭 같지 않아서, ‘잘-빨리’ 가는 게 ‘잘-행복하게’ 사는 건 아니지요. 비행기의 제트 엔진이 아니라, 내 수고와 기다림이 달린 날개 짓으로 날아야 ‘잘 가는-사는’ 것이겠습니다. 사월의 마지막 주, ‘잔인한 사월’은 가고 ‘여왕의 계절’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빨리’ 가려 들지 않아도, 시간은 이렇게 훅 하고 날아가네요. ‘어서 오라’고 보채지 말고 가만히 기다려 보는 일, ‘하나님 나라’의 ‘구원열차’도 ‘완행’은 아닐까요? 그나저나, 이제 어른이 다 되었을 ‘박희영 어린이’는 여전히 ‘완행버스’를 좋아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