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할 것-염려 말 것

“인기는 곧 사라지는 것이다.” 1.500:1의 경쟁률을 뚫고 캐스팅 된 영화 <아가씨>를 찍고 난 후 배우 김태리 씨가 한 말입니다. 이제 막 조명 받기 시작한 신인배우가 아니라 은퇴를 앞 둔 원로 입에서나 나올 법한 말입니다. ‘칭찬’에 관한 그녀의 말도 인상 깊습니다. “칭찬을 들으면 마음에 헬륨 풍선이 하나 둘씩 생긴다. 붕 뜨려고 한다. 그러면 난 그 풍선을 하나 둘씩 터트린다. 칭찬을 좋아하지만 지금은 받아들일 때가 아니다.” 정신없이 치솟는 인기와 칭찬을 대처하는 당차고 성숙한 모습이 읽힙니다.
이제 예수님은 소문이 자자한 인물이 되었습니다. 어디어디에 ‘떴다’는 소문만 들리면 BTS ‘아미’처럼 사람들이 몰려듭니다. 그날도 그랬습니다. 운집한 군중이 ‘수만 명’이었다 하니, 발 디딜 틈도 없었겠지요. 예수님의 ‘인기’가 하늘까지 치솟자 제자들은 고무되었을 겁니다. 이런 인기와 여세라면, 머잖아 예루살렘에 도착해 세상을 확 뒤집어엎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 수 있으리라 기대했겠지요.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붕 뜬 마음의 ‘헬륨 풍선’을 ‘펑’ 터뜨리십니다. “바리새인들의 누룩 곧 외식을 주의하라.”(12:1)
배우들은 무대에 오르면 ‘나’와 ‘배역’을 구분하지 않습니다. ‘배역’에 ‘나’를 몰입해서 혼신을 다해 연기하고 무대에서 내려옵니다. 무대에 섰을 때의 배역이 ‘나’인지, 무대에서 내려온 내가 ‘나’인지, 연기를 마치고 내려온 배우는 혼돈스럽습니다. ‘위선’은 ‘진짜 나’를 감추는 일입니다. 역할에 몰입하고 혼신의 힘을 다해 멋진 연기를 보였어도 무대의 ‘나’는 ‘진짜 나’가 아닙니다. ‘위선’은 ‘무대 위의 나’를 ‘진짜 나’로 잘못 알아보게 합니다. 배우 김수미 씨를 <전원일기>의 ‘일용엄니’와 동일시하는 겁니다.
무대에서 내려오면 더 이상 ‘일용엄니’가 아닙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김수미 씨를 보며 여전히 ‘일용 엄니’를 떠올립니다. 그러다보면 ‘나’와 ‘일용엄니가 분간이 안 갈수도 있습니다. 바리새인의 위선이 그랬습니다. 겉은 그럴듯하게 부풀었지만 속은 텅 빈 ‘공갈빵’ 같은 바리새인들이지만, 사람들은 겉 다르고 속 다른 저들의 정체를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긴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습니다(12:2). “어두운 데서 말한 모든 것, 골방에서 귀에 대고 말한 것”도 다 드러날 겁니다(12:3).
요는 예수님의 제자들도 ‘위선’에 빠질 위험이 있다는 겁니다. 그럴듯한 겉모양을 보이며 ‘속’도 그런 것처럼 꾸며 예수를 따른다면, 그게 ‘누룩’이고 ‘위선’입니다. 수만 명이 운집한 군중 앞에서 어깨를 으쓱이며 ‘예수’를 ‘자랑’하고 있지만, 그 자랑이 끝까지 갈 것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어쩌면 제자들의 ‘자랑’은 머잖아 ‘두려움’이 될 수도 있습니다. 예수께서 ‘죽음의 길’로 가고 계신 까닭입니다.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마땅히 두려워할 자…그를 두려워하라.”(12:4-5)
‘매’가 무섭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겁니다. ‘나’를 죽일 수도 있는 저 곤장이 우리를 두렵게 합니다. 그게 인간이 사는 현실입니다. 목을 죄는 돈줄이 무섭고, 바람을 가르며 번쩍이는 ‘먹고 사는 현실’의 칼이 두렵습니다. 그 두려운 현실 앞에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으로 맞서는 것이 ‘제자들의 믿음’이어야 합니다. ‘매’는 무서운 것이지만, ‘매’보다 더 무서운 건 ‘관계의 끊어짐’입니다. 먹고 사는 현실이 무서운 것은 사실이지만, 그게 무섭다고 ‘예수 이름’ 감춰가며 숨 쉬고 살 수는 없습니다.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인자도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부인을 당하리라.”(12:8) 예수를 따르는 수만 명 군중 앞에서야 ‘예수’가(예수의 제자된 것이) ‘자랑거리’입니다. 하지만 ‘가야바의 법정’에서라면 상황이 달라집니다. 그 때는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시인하려면 ‘자기’를 ‘부인’해야 합니다. 예수를 시인하면 같이 잡혀 갑니다. ‘가야바의 법정’에서는 ‘자기 부인’을 하지 않으면 ‘예수’를 ‘주’라고 ‘시인’할 수 없습니다.
‘자기 부인’없이 ‘예수를 시인’하는 건 ‘거짓복음-위선’입니다. ‘자기 긍정’과 ‘자기 번영’의 복음은 ‘수만 명 앞에서’ 앞길이 훤히 보일 때의 스탠스입니다. 하지만 예수께서 가시려는 저 앞길은 매우 어둡습니다. 그 길을 따라가려니 ‘제자의 길’도 울퉁불퉁합니다. 하지만 ‘두려워하지 말라’십니다. 참새 한 마리도 잊지 않으시는 하나님께서, ‘예수의 길’ 따르는 제자들을 잊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머리털 같이 많은’ 우리의 사연을, 하나님께서 다 알고 계십니다. 그분이 ‘기억’하시는 한, 그냥두지 않으실 터입니다. 평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