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 울타리를 쳐 두겠어”

내 마음에 숲 울타리를 쳐 두겠어 / 네가 만약에 말이야, 으르렁거리며 날 찾아온다면 / 내게 오는 동안 넌 내가 두른 초록 숲 울타리에서 / 길을 잃고 잠시 헤맸으면 해. // 꽃과 풀이 부르는 느린 노래, / 거미줄에 걸린 둥근 이슬에 젖어 / 네 걸음은 사뿐사뿐 더디어지고 / 헝클어진 가지마다 고개 숙여 안녕! / 하고 너는 인사를 하겠지. // 그래서 기어이 네가 날 찾아왔을 땐 / 사납게 으르렁거리는 늑대 대신 / 작은 새 한 마리 네 가슴에 들었으면 좋겠네. // 내 말을 너는 잘 알고 있지? // 우리 서로 으르렁거리며 싸우지 말고 / 작은 새들처럼 사이좋게 / 지지배배거리며 지내자는 말이야. 널 기다린단 말이야. // 나의 숲이 네 마음에 부디 들기를.
– 정유경 <내 마음에 숲 울타리를 쳐 두겠어>

브로드웨이 블록버스터 뮤지컬 <위키드>가 한국 라이센스로 세 번째 공연의 막을 올렸습니다. ‘믿보위(믿고 보는 위키드)’라는 말이 생길만큼 ‘입증된’ 뮤지컬이라지요. 옥주현-정선아 씨가 주연을 맡은 회차는 티켓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랍니다. 누군가 그 ‘별’을 따다 제 주머니에 넣어주더군요(참고로, 이건 오십 넘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공연을 앞 둔 서너 주가 소풍 앞둔 어린아이 가슴처럼 설레더랍니다.
공연 당일, 먹고 싶다는 치킨 한 마리 배달해서 아이들 식탁에 올려놓고 서둘러 지하철을 잡아탔습니다. 시원하게 내달린 지하철은 어김없는 시간에 우리를 데려다 주었고, 쉰 중반의 부부는 더듬거리며 낯선 공연장 예약된 자리에 찾아 앉았습니다. 세 시간 가까이 이어지는 공연을 숨 죽여 관람하다가, 공연이 끝나자 약속처럼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를 치는 고로 덩달아 따라 일어나 손바닥에 불이 나도록 박수를 보내고 돌아왔습니다.
<위키드>는 <오즈의 마법사>의 또 다른 버전입니다. <오즈의 마법사>를 해체하고 다시 조합하여 <위키드> 방식의 이야기를 완성하지요. 때문에 전작의 기본 설정이 완전히 뒤집힙니다. ‘오즈의 마법사’는 에메랄드 왕국의 포악한 독재자로 분하고, ‘사악한 서쪽 마녀(엘파바)’는 편견과 불의에 맞서는 정의로운 인물로 그려지지요. 알고 보니, 우리가 ‘알던’ <오즈의 마법사>가 아니었고, 우리가 몰랐던 속사정이 있더라는 겁니다.
홍상수의 영화 <잘 알지도 못하면서>의 마지막 장면, ‘고순’은 ‘구경남’의 사랑고백에 이렇게 답한다. “날 알아요? 잘 알지도 못하면서…. 아는 만큼만 안다고 해요.” ‘통념의 희생’이라는 게 있답니다. ‘그럴거야’를 ‘사실’처럼 말하면 ‘그렇지 않음’이 ‘사실’로 둔갑해 버리는 거지요.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닌데, 저 사람은 ‘나’를 그런 사람으로 알고 ‘그런 사람이지?’ 해버리면 ‘내’가 그 사람의 ‘통념’에 희생되고 맙니다.
희생은 ‘나’만 당하는 게 아니지요. 나의 통념이 누군가를 희생시키기도 합니다. 소개해 드린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그래요. 줄곧 타인들의 통념에 의해 ‘내’가 희생 당해온 ‘구경남’이,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는 자기 통념으로 ‘고순’을 희생시키거든요.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런 말 하지 말라’는, ‘아는 만큼만 알면서 함부로 말하지 말라’는, 그러며 묻는 ‘고순’의 쐐기 같은 질문이 남의 말 같질 않은 겁니다. “날 알아요?”
“내 마음에…울타리를 쳐 두겠어.” 대개 그 울타리가 ‘통념의 울타리’라는 게 비극입니다. 통념의 포인트는 ‘보이는 것’에서 쌓이는 것이겠는데, 실은 ‘보이는 게 다’는 아니거든요. 잘 못 보고 “으르렁거리며” “사납게” 찾아오는 ‘늑대걸음’을 보며, ‘내 마음에 주단을 깔고’ 기다릴 수가 없습니다. ‘내 마음의 울타리’가 가시덤불 되는 까닭입니다. <위키드>의 ‘서쪽마녀, 엘파바’도 세상에 대고 소리치고 싶었을 겁니다. “날 알아?”
<위키드>의 ‘넘버’ 중 백미로 꼽히는 ‘글린다’의 ‘퍼퓰러(Popular)’는 멋진 노래입니다. 노래가 끝나고 ‘핑크 요정 글린다’가 ‘초록 마녀 엘파가’에게 이렇게 말해요. “핑크와 초록은 잘 어울려.” 그럴리가요. 어느 ‘핑크’가 ‘초록’과 잘 어울린 답니까.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지요. 그런데, 그게 다 ‘잘 몰라서’ 가진 통념인겁니다. 실은 ‘잘 어울리지 않는 색’은 없어요. ‘잘 어울리지 않는 태도’가 있을 뿐이지요.
‘통념의 울타리’가 ‘가시 울타리’를 만들어요. ‘가시 울타리’로 찾아온 으르렁 늑대걸음이 ‘싸움’이 되고, ‘피’가 되고, ‘눈물’이 됩니다. 이런 전쟁의 세상을 살라고 보내심 받은 건 아니어서, “내 마음에 숲 울타리를 쳐 두겠어” 노래를 부릅니다. 그 숲에 ‘꽃과 풀의 느린 노래’가 흐르면 “헝클어진 가지마다 고개 숙여 안녕!”할 수 있을까요. 그걸 다 알 수 없다 해도 ‘가시 울타리’ 걷어내고 ‘숲 울타리’를 둘러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