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순’의 ‘믿음’

쥐 잡으려고 독약 섞어놓은 고구마를 / 쥐는 먹지 않고 강아지가 먹었어요 / 강아지는 마당에 사지를 퍼덕이며 / 앞산 메아리와 함께 죽어가요 / 강아지가 죽어가는 마당 울타리의 / 꽃들이 미쳤어요 / 종일 웃고 있어요 / 어머니는 그 울타리에 빨래를 널어요 / 웃고 있는 꽃들에게 찬물을 끼얹어요 / 마루 끝에 우두커니 앉아 마당을 지켜보던 / 뇌수술을 마친 아버지가 나더러 여보라 불러요
– 최명란 <모순에 대해>

순리라는 게 있습니다. 이것 다음에 저것이 따라야하고, 이런 모양은 저런 모양과 어울려야 합니다. 그래야 ‘합’이 좋고, 보기에 좋고, 마음도 편합니다. 저것이 이것을 앞서거나 어울리지 않는 모양이 뒤섞이면 이걸 어쩌나 싶고 불편해져요. 그런 관찰은 이해도, 해석도, 적용도 어려운 묵상이 됩니다. 그런데 삶이라는 게 꼭 순리를 따라 되는 건 아니지요. 까닭을 알 수 없고 의미를 새길 수 없는 ‘모순’이 덩어리 채 굴러올 때가 많거든요. “쥐 잡으려고 독약 섞어놓은 고무마를 / 쥐는 먹지 않고 강아지가 먹었어요.” “강아지는 마당에 사지를 퍼덕이며 / 앞선 메아리와 함께 죽어가”는데, “마당 울타리”에 핀 꽃들은 “종일 웃고 있어요.” 이 마당에 어떻게 저리 활짝 웃으며 필 수 있을까요. 이러면 안 되는 거죠. 꽃들이 미친 겁니다. 모순입니다.
꽃들만 미친 게 아니었습니다. 어머니가 “그 울타리에 빨래를 널”며 꽃들의 ‘미친 웃음’에 “찬물을 끼얹”는데, “마루 끝에 우두커니 앉아 마당을 지켜보던 / 뇌수술을 마친 아버지가 나더라 여보라 불러요.” 마루 끝에 앉은 아버지도 제 정신 아닌데, ‘아버지의 여보’가 된 딸 도 정신 차리기 어렵습니다. 미칠 것 같은 세상, 이러다 미쳐 버려도 괜찮을 것 같은 날입니다. 머리를 풀고 땅을 치며 통곡이 쏟아지는 날, 집 앞 가까운 산머리도 아득하고 희미해집니다. 안구보다 마음이 더 뿌연 날, 뭐가 눈에 들어와 뭘 제대로 볼 수 있을까요. 금강산 일만 이천 봉에 눈 밝아질 턱이 없고. 산해진미에 입맛 돌 리 없습니다. 한 끼, 두 끼 몇 날 밥상을 거르다, 사지 퍼덕이는 강아지마냥 마당에 쓰러질 지도 모를 일이지요. 그 마당에는 또 어떤 꽃이 활짝일까요.
그러다 몇 날이 지나면 꼬르륵 허기를 알리는 신호에 밥숟가락이 떠올라가고, 꿀떡 마른 목으로라도 밥은 넘어가겠지요. 어떻게 이 상황에 목구멍으로 밥이 넘어가는지, 그게 또 못 견딜 만큼 환장할 일이 됩니다. 아도르노(Theodor Wiesengrunt Adorno)는 그런 말을 했다지요. “아우슈비츠 이후에 서정시를 쓰는 것은 야만이다.” 가스실과 생체실험으로 희생된 사 백 만 명의 현실은 ‘야만성’의 민낯입니다, 그 야만의 현장을 두고 목구멍으로 밥이 넘어 간다면, 그 밥상도 야만스러운 거지요. 흘러가는 구름과 이제 막 피어난 꽃 한 송이를 ‘아름답다’고 노래하는 건 ‘야만(스런 인간)이 없는 세상’에서나 통용되어야 할 문법일겁니다. 그럼에도, 그렇더라도, 밥은 꿀떡 넘어가고 꽃밭가득 환한 봄날은 ‘환장할’ 만큼 아름답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요.
고약한 현실을 비껴 서정을 노래한다는 건 그저 인간의 ‘야만스러움’ 뿐 인 걸까요. 아도르노에 따르면 “아우슈비츠는 광기난 비정상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인간이 그렇게도 자랑스럽게 여겼던 ‘이성’ 혹은 ‘합리성’ 때문에 발생”한 일이랍니다. 그가 설명하는 <부정변증법>을 다 이해하기 어렵지만, 한 가지는 분명해 보입니다. 세상은 ‘이성’ 혹은 ‘합리성’으로 다 설명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 따지고 보면 ‘광기’도 ‘이성’의 연장인 거지요. 출발점에서 미쳐 시작하는 현실은 없겠으니 말입니다. 미쳐 돌아가는 세상, 함께 미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현실의 앞마당에 실은 ‘이성의 꽃’이 “종일 웃고 있”었던 건 아닐까요. 그 웃음에 “빨래를 널”며 “찬물을 끼얹어” 본다지만, 실은 그 둘 사이가 빨래줄 처럼 길게 이어져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여러 날 시편을 묵상했습니다. 솔직히는 시인의 탄식이 지겹기도 했습니다. 믿음은 굴뚝같은데 현실은 하나도 달라지지 않습니다. 목이 터져라 애원하고 때로 잠잠히 기다려보기도 하지만, 시인은 괴롭고 시인을 괴롭히는 현실은 멀쩡합니다. 그 하늘에 해가 뜨고 별이 진다는 게 수긍되지 않습니다. 이건 야만의 현실입니다. 하나님의 존재와 인간의 현실이 아무래도 모순 같아 보였습니다. 짧은 ‘이성’과 턱없이 모자란 ‘합리’로 고개를 끄덕일 수가 없습니다. ‘모순’을 풀 해법이 없습니다. ‘모순’은 설명될 수 없어서 ‘모순’인 거지요. 삶의 여러 장을 넘겨가며 시인은 ‘설명’이 아니라 ‘고백’과 ‘기도’와 ‘노래’를 이어가더랍니다. 대체 어떤 하나님을 믿어 “뇌수술을 마친 아버지가 나더러 여보라 불러”도 ‘노래’가 나오는 걸까요. 그것도 ‘믿음’의 ‘모순’일까요.